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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차 디어릴리 (1기)
Keyword3.
여행
Editor.
디어릴리 (1기)
지금이 아니면 안돼
‘지금이 아니면 안돼.’
번아웃에 시달리는 나를 보다 못한 대표님이 휴직을 권유하셨다. 사실 내심 바라고 있었다. 넙죽 받아들인 나는 당장 내일부터 휴직하겠다고 바로 선언했다. 아, 그런데 생각보다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공허했다.
휴직계를 낸 후 첫 일주일 동안은 불 꺼진 내 방에서 폐인으로 지냈다. 의자를 뒤로 젖히며 내 방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지금이 아니면 유럽에 발을 못 디뎌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떠나자.’ 바로 스카이스캐너 앱을 켜 티켓을 끊었다. 성수기의 티켓 가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나의 첫 유럽 여행이 덜컥 시작되었다. 첫 유럽 여행이자, 처음으로 혼자 떠나는 여행이기도 했다. 첫 솔로 트립의 행선지가 유럽이라니. 아름다운 풍경과 랜드마크들이 반겨주는 만큼, 소매치기와 인종차별도 득실득실한 곳. 그래서 유럽에 간다고 하자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찼다. 모두가 나의 순진함을 걱정했다. 신중하긴 하지만 야무진 것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마음을 잘 주는 편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무리 봐도 불안하던지, 대사관 번호를 쪽지에 적어 건네준 친구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고맙다.)
그렇지만 이들 중 여행을 떠나는 당사자만큼 걱정한 사람은 없었을 테다. 국제 미아가 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유심과 휴대폰을 세 개씩 챙기고, 계속해서 유튜브로 소매치기 영상을 검색하는 나였다. 점점 사람들도 유럽이 아니라 오지 탐험을 가느냐며 웃었다. 그렇지만 나는 출국하는 당일날까지 모든 위기 상황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며 영국행 비행기에 탔다.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고 도착한 영국에서는 어이없을 정도로 좋은 추억들만 생겼다. 2주간 영국에 있는 친구의 집에서 머물다가 포르투갈, 스페인으로 넘어갔다. 행선지만 보면 축구 덕후인가 싶겠지만 사실 해리포터를 테마로 한 여행이었다. 해리포터의 탄생지 런던, 그리고 해리포터를 쓴 조앤 롤링이 잠시 교사로 있었던 포르투가 여행의 큰 꼭짓점이었다. 스페인은 포르투갈 바로 옆에 있다는 이유로 잠시 들른 곳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여행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은 바르셀로나에서 생겼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밤, 2층 관광 버스에서 핑크빛 노을을 바라보는데 눈물이 주륵 흘렀다. 살아있는 게 행복해서. 차츰 저물어가는 하늘, 덥지도 춥지도 않게 불어오는 바람, 들뜬 관광객들의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었다. 처음으로 살면서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느꼈다. 온전한 자기 수용의 순간이었다. 한국에서 나는 항상 부족한 부분에 집착했고, 이 점이 번아웃이 온 원인이기도 했다. 여행은 나를 회복시켰다. 나라는 사람이 그 존재만으로 ‘괜찮다’는 것을 상기시켜줬다.
바르셀로나에서 인천 공항으로 다시 돌아오며, 약 한 달 간의 유럽 여행을 마무리했다. 이 때의 여행은 나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혼자 여행을 시작하고 끝내보며 여행과 인생이 아주 많이 닮아있다는 걸 느꼈다.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소매치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길을 잃어 새로운 곳을 알게 되고, 인연들이 탄생했다.
그리고 유럽이라는 곳이 정말 존재하는구나,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오랫동안 나는 유럽 여행을 ‘로망’으로만 남겨놨었다. 그렇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마음이, 그 로망을 ‘욕망’으로 바꾸었다. 버킷리스트에 미뤄놨던 꿈들은 마치 유튜브의 ‘나중에 보기’ 재생목록처럼 쌓여만 간다. 그렇지만 정말 이루고 싶은 꿈은 아끼는 순간 이룰 수 없다. 여행은 내게 꿈을 아끼지 말라고 말해줬다. ‘지금이 아니면 안돼.’ 리에이크 에디터 클럽을 계기로, 1년이 지난 지금이지만 그 때의 순간들을 기록해보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