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e Your First Project
Start adding your projects to your portfolio. Click on "Manage Projects" to get started
3주차 엔슈
Keyword3.
여행
Editor.
엔슈
낯선 도시, 작품 하나와 속삭임 하나
‘여행은 돌아와서도 오래도록 삶을 지탱해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지만, 어떤 기억은 마음속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다가 불쑥 떠오르며 다시 삶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곤 합니다. 저에게도 지칠 때마다 마음 한 켠에서 꺼내 보는 소중한 추억이 하나 있습니다.
어릴 적 미술관은 제게 가장 익숙한 공간이었습니다. 주말이면 엄마 손을 잡고 전시를 보러 갔고, 그림 앞에 오래 서 있는 일이 자연스러웠습니다. 미술은 제 삶의 언어가 되었고, 망설임 없이 전공으로 삼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좋아하던 것을 ‘공부’로 마주하게 되자, 마음은 점차 멀어졌습니다. 책 속의 작품들은 지루하게 느껴졌고, 전시장에서의 두근거림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 ‘좋아한다’는 감정은 사라지고 막연한 회의감만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지금 예술을 싫어하게 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작품들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루해진 것이 아닐까? 이 작품들을 내 두 눈으로 봤을 때도 여전히 재미 없다면, 그때 포기하는 것이 맞는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 책으로 이 작품들을 볼 게 아니라, 미술관에 가서 이 작품들을 직접 만나야겠다. 한 번도 유럽에 가본 적이 없는 제게, 무작정 학교를 휴학하고 떠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고민없이 학교를 휴학하고 모아놓은 돈으로 떠난 여행은 예술을 향한 나의 진짜 마음을 시험해보겠다는, 나름의 비장한 각오였던 셈입니다.
그렇게 도착한 유럽은 낯선 도시와 언어,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유일하게 낯설지 않았던 건 사랑하는 작품들을 따라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서, 운명처럼 한 작품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Meisje met de parel〉입니다. 사실 저는 이 작품에 큰 기대를 품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마우리츠 하위스 미술관을 찾은 것도, 다른 그림들을 보기 위해서였고 이 작품이 어느 전시실에 있는지조차 미리 확인해두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도 그날 가장 제 기억에 깊게 남은 그림이 바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였습니다. 핀 조명 아래 투명하게 빛나던 소녀의 눈빛은 제가 이곳에 올 것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다정하고도 묘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홀린 듯 그림 앞에 선 순간, 전시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페이드 아웃되며 작품과 나, 단 둘만이 그 자리에 머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넋을 놓고 보고 있었을까, 한 백인 할아버지가 다가오더니 제게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Isn’t it beautiful?”
그 짧은 한마디가, 여행 내내 품고 있던 제 질문에 답을 주었습니다. 낯선 도시의 언어와 풍경 속에서 오직 이 작품 하나를 같이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오롯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작품을 함께 보는 그 순간만큼은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의 거리가 무색해졌습니다.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이 단 하나의 그림 앞에서 같은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 그것은 제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예술의 힘이자, 예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날 저는 예술이 단지 ‘보는 것’을 넘어, 누군가의 마음을 살피는 조용한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작품 한 장이 전한 그 고요한 울림을, 언젠가 다른 누군가에게도 건네고 싶어졌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깨달았습니다. 이 여행은 하나의 챕터를 마무리하러 떠난 것이 아니라, 삶의 다음 챕터를 열기 위해 떠난 것이었다는 것을요. 당신에게도 그런 여행이 있었나요? 길 위에서 잊고 있던 감정을 되찾거나, 자신을 다시 만나게 해준 순간 말이에요. 그 여정의 끝에서 당신은 무엇을 다시 사랑하게 되었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