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일본 빈티지 마니아들이 한림수직 라벨이 달린 옷을 컬렉션한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어요. 한림수직은 제주에서 시작한 니트 브랜드로 제주 사람들, 특히 제주 여성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게다가 파란 눈의 신부가 제주까지 내려와 만든 브랜드라니. 흥미롭고 재미난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얽혀 있었죠.
하지만 당시 국내에서 한림수직은 잊혀지고 있었어요. 이를 알리기 위해 <iiin> 매거진(2020년 봄호, ‘한림수직을 아시나요?’) 특집 기사를 작성해 한림수직을 소개했죠. 제주 곳곳에 흩어져 있는 한림수직의 발자취를 좇으며 세월의 흔적이 진하게 묻은 상품과 이를 소중하게 간직한 사람들, 당시 한림수직에서 근무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어요.
한림수직은 먹고 살 길을 찾아 육지로 나가야 했던 제주 여성을 1,300여 명 넘게 고용해 일자리를 창출했고 설립 당시 35마리였던 면양은 1,000여 마리까지 늘어나며 몸집을 키웠어요. 생산자에게 자부심을 주고 소비자에게 만족감을 선사한 이 브랜드의 특별함을 지면으로만 보여주기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한림수직을 다시 되살리기로 결정했고요.
2021년 제주에서 한림수직을 되살리는 ‘한림수직 재생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예전만큼, 아니 예전보다 더 근사한 브랜드 스토리와 상품을 선보이기 위해 부지런히 제주를 살폈어요. 성이시돌목장의 사람들을 만나고 당시 한림수직에서 근무한 이들을 수소문했어요. 구전으로 흘러온 한림수직 이야기를 수집하는 것부터 시작했죠. 제주 산업의 역사와 기록을 살피고 업계 종사자를 만나는 등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고요.
아주 적은 수량의 한림수직 상품과 사진 자료 정도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복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요. 과거 한림수직은 카디건의 단추를 다는 작은 과정까지 모두 손으로 작업했대요. 만드는 방법도 까다롭고 노동 집약적인, 그러니까 비용이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제작 시스템을 지녔죠.
많은 업체와 미팅을 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수익이 나지 않아서 어렵다'는 회신이 대부분이었어요. 여러 난항 속에서 한림수직을 복원하는 일이 쉽지 않겠다는 직감이 들었지만, 동시에 과거 한림수직이 지닌 명성과 그 속에 담긴 정성과 노고에 흠이 가지 않도록, 제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죠.
2005년 한림수직이 폐업한 뒤 성이시돌목장에서 나오는 양털은 버려지고 있었지만 한림수직 재생 프로젝트로 다시금 쓰임을 되찾았어요. 국내에 단 한 곳만 남은 양털 세척 업체로 보낸 후 얼룩덜룩한 털은 직접 손으로 골라내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쳤고 이는 한림수직 의류를 생산하는 원사가 됐죠. 그리고 그 실로 첫 해에는 스웨터와 머플러를, 이듬해에는 시그너처 카디건을 복원했어요.
2023년에는 양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방식으로 생산한 ‘뮬징프리’ 울로 한림수직 전용 원사를 개발했어요. 한림수직 장인의 디테일을 더해 오리지날리티를 살린 시그니처 카디건을 출시하고 직조 라인을 대표했던 담요까지 되살렸어요.
한림수직의 상품을 다시 생산하는 것은 단순히 상품을 복원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녀요. 한림수직은 어려웠던 시절 제주 여성의 일자리를 창출한, 제주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엄연한 로컬 브랜드예요. 이를 복원하는 것은 한림수직 상품에 향수를 지닌 이들의 애정과 당시 고사리 손으로 부지런히 상품을 생산한 작업자의 마음까지 되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